“그런데 사회적 차별을 예방하는 일이 도리어 그 차별에 명분을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이를 의학 본연의 구실로 볼 수
있을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월호
출생 전 진단으로 태아의 잠재적 질병을 예방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아이디어 같았다. 이 아이디어는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이 질병 유전자를 하나 둘씩 찾아냄에 힘입었다.
질병 유전자를 갖는다고 해서 100% 발병하는 것은 아니다. 발병에는 분명 환경적인 요인이 무시 못 할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진단으로 태아가 20세, 혹은 30세 이후에 특정 질병이 발병할 확률이 90% 이상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 때도 환경적 요인을 계속 거론할 순 없다.
출생 전 진단은 여러 나라에서 자리 잡는 데 여러가지 갈등과 부딪친다. 합법화된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다. 합법화 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 대해 허용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가지 논쟁점이 여전히 존재한다.
6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지에 실린 기사에는 왜소증에 대한 케이스를 다루고 있다. 출생 전 진단 사항에는 왜소증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소증은 실제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어떤 질병은 아니다. 하지만 왜소증이 신체적, 심리적 소외감을 주기 때문에 진단 사항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위의 질문을 던진다. 왜소증을 진단하는 것은 사회적 차별을 예방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제거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왜소증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받고 있음을 인식, 수용하고, 이 차별에 굴복함으로써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을 오히려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기자는 뒤이어 중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 역시 사회적 차별의 잠재성을 안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남아선호사상이 우세했던 것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출생 전 진단으로 남녀감별을 할 때 사회적 차별을 예방하기 위해 여아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 차별의 장벽을 굳건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셈이다.
해묵은 질문이 여기쯤에서 다시 떠올랐다.
과연 '정상'이란 무엇인가. '정상적인'이라고 하는 게 과연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것인가.
성인 남성의 키 평균이 175cm 가량이라고 하자. 그러면 키가 150cm인 성인 남자는 '비정상'인가.
Normal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규격의 범위(range)에서 벗어나지 않은 걸 가리킨다. 그리고 흔히 규격의 범위는 평균을 중심으로 정해진다. 그렇다면 정상=평균 인가?
남들과 다르면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이 때 남들은 '다수'이다. 다른 이는 '소수'이다.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경우, 비정상은 정상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이동을 하는 것인가?
가타카의 세상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부적격자(invalid) 빈센트가 완벽한 우성인자 조합의 제롬이 되게 하는 세상. 아니, 적어도 그런 세상을 끌어당길 만한 밧줄 올가미는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 올가미를 던지는 방향은 철학/윤리 담론이 제시해주어야 한다.
계속해서 뒷걸음질치고 있는 현재 - 그것도 스스로 두려워서 뒷걸음질치는 것이 아니라 밀리고 밀리면서 뒷걸음질'쳐지'고 있는 - 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부재를 절실히 느낀다.
ps. 최근 개봉한 <3XFTM>. :: 정상-비정상의 경계는 중력처럼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회적/문화적 틀 안에서 형성되는 어떤 불균일층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중력보다 훨씬 더 자주 맞닥뜨린다. - 문제는 이걸 인지조차 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니, 인지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런지도.)
출생 전 진단으로 태아의 잠재적 질병을 예방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아이디어 같았다. 이 아이디어는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이 질병 유전자를 하나 둘씩 찾아냄에 힘입었다.
질병 유전자를 갖는다고 해서 100% 발병하는 것은 아니다. 발병에는 분명 환경적인 요인이 무시 못 할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진단으로 태아가 20세, 혹은 30세 이후에 특정 질병이 발병할 확률이 90% 이상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 때도 환경적 요인을 계속 거론할 순 없다.
출생 전 진단은 여러 나라에서 자리 잡는 데 여러가지 갈등과 부딪친다. 합법화된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다. 합법화 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 대해 허용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가지 논쟁점이 여전히 존재한다.
6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지에 실린 기사에는 왜소증에 대한 케이스를 다루고 있다. 출생 전 진단 사항에는 왜소증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소증은 실제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어떤 질병은 아니다. 하지만 왜소증이 신체적, 심리적 소외감을 주기 때문에 진단 사항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위의 질문을 던진다. 왜소증을 진단하는 것은 사회적 차별을 예방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제거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왜소증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받고 있음을 인식, 수용하고, 이 차별에 굴복함으로써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을 오히려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기자는 뒤이어 중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 역시 사회적 차별의 잠재성을 안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남아선호사상이 우세했던 것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출생 전 진단으로 남녀감별을 할 때 사회적 차별을 예방하기 위해 여아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 차별의 장벽을 굳건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셈이다.
해묵은 질문이 여기쯤에서 다시 떠올랐다.
과연 '정상'이란 무엇인가. '정상적인'이라고 하는 게 과연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것인가.
성인 남성의 키 평균이 175cm 가량이라고 하자. 그러면 키가 150cm인 성인 남자는 '비정상'인가.
Normal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규격의 범위(range)에서 벗어나지 않은 걸 가리킨다. 그리고 흔히 규격의 범위는 평균을 중심으로 정해진다. 그렇다면 정상=평균 인가?
남들과 다르면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이 때 남들은 '다수'이다. 다른 이는 '소수'이다.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경우, 비정상은 정상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이동을 하는 것인가?
가타카의 세상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부적격자(invalid) 빈센트가 완벽한 우성인자 조합의 제롬이 되게 하는 세상. 아니, 적어도 그런 세상을 끌어당길 만한 밧줄 올가미는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 올가미를 던지는 방향은 철학/윤리 담론이 제시해주어야 한다.
계속해서 뒷걸음질치고 있는 현재 - 그것도 스스로 두려워서 뒷걸음질치는 것이 아니라 밀리고 밀리면서 뒷걸음질'쳐지'고 있는 - 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부재를 절실히 느낀다.
ps. 최근 개봉한 <3XFTM>. :: 정상-비정상의 경계는 중력처럼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회적/문화적 틀 안에서 형성되는 어떤 불균일층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중력보다 훨씬 더 자주 맞닥뜨린다. - 문제는 이걸 인지조차 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니, 인지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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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 재밌다. 아이러니한 문제군. 차별을 예방하는것이 차별에 명분을 준다라..ㅎㅎㅎ 생물학쪽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구나. 다름_을 차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차이_로 받아들이는것이..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지. 다름이 곧 불평등을 얘기하는것일까.
문제는 나도 말로는 이렇게 하고,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생각할 때면, '그래,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면 안 되지-'라고 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다거나 할 때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지나가서 다시 되돌이켜보면 그런 게 소름끼쳐. 내가 원하지 않는, 심지어 혐오하는 일면들이 나에게도 배어있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