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 119 분 / 2009.03.19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출연
카가와 테루유키(사사키 류헤이), 코이즈미 쿄코(사사키 메구미), 코야나기 유(사사키 타카시), 카이 이노와키 (사사키 켄지)
:: 제3회 아시아 필름 어워즈 (2009) 최우수각본상
:: 제3회 아시아 필름 어워즈 (2009) 최우수작품상
:: 제61회 칸영화제 (2008) 심사위원상(주목할만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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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이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되니, 영화 내용을 알기 원치 않는 분들은 살포시 닫아주세요-)
바람에 흩날리는 신문과 잡지. 집 안은 방치된 듯 싶다. 피트하게 단정된 집 안에 부는 바람은 흡사 싸늘한 폐허와 같은 느낌을 준다. 비가 들이차는 창을 닫고 분주하게 바닥을 닦는 메구미는 무심코 올려다본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하고 다시 창을 연다. 그렇게 열심히 닦던 바닥에 다시 빗물이 들이차는데도. 이 오프닝 씬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한 번에 표현해주었다. 황폐하게 버려진 듯한 집안, 가족의 생활공간- 그 안으로 폭풍우를 알리는 빗물이 휘몰아치는데 집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알고 있고 포용할 주부는 그 풍경에 넋을 놓은 듯 멍하니 바라본다. 그 순간 주부의 역할은 잠시 잊혀지고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 그녀는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것일까.
폭풍우는 곧장 사사키에게로 이어진다. 웅웅웅웅- 휘몰아치며 울리는 바람소리는 끝을 알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절망으로 그를 밀어넣는 모터 소리 같기도 하다. 뭔가 잘못됐다는 듯한 기분, 이건 아닐 거라는 기분, 내 자리가 없어지기 전에 - 이미 없어진 셈이지만 - 내가 없애고 나오겠다는 듯한 굳은 손놀림. 하지만 그도 알고 있을 거다. 나는 빼앗긴 거다- 라는 상실감.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확실치 않아졌지만.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니,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사는 게 얼마나 될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러면서 돈을 벌고, 또 하루하루 살고, 미래를 대비한다고 말한다. 사사키는 잠시 망설이다 출근하는 인파 속으로 섞여든다. 애초에 집을 나설 때부터 어디로 향해야 할 지 알지 못 했다. 그가 매일 아침 나서던 길은 습관이자 의무이고 책임, 그리고 동시에 권리였으니까. 그 모든 것의 집약점인 '직장'이 사라진 마당에 그의 목적지는 상실되었다. 그는 그렇기에 다시 목적지를 설정하고자 한다.
축 처진 어깨와 터덜터덜 걷는 발걸음의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있다. 하루, 아들의 열린 가방을 닫아준다. 또 하루, 그저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 걸어간다. 그렇게 하루, 하루, 가족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생겨난다.
비가 들이차는데도 멍하니 밖을 바라볼 때부터 메구미의 주위에 감도는 분위기는 일종의 갈망이다. 무심한 척, 아무 것도 아닌 양 웃으며 넘어가지만 '운전면허'는 그녀의 내밀한 욕구를 표방한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그녀에게도 want가 존재한다. 가족들이 먼저 밥을 먹고 일어나면 홀로 식탁에 앉아 밥을 마저 먹는 그녀, 어머니- 혹은 아내-이기 이전에 그저 주부라는 얼굴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한 가정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얼굴.
그녀가 신분증 대용이 아닌 면허증을 따고, 차를 보러 가는 것 역시 '여기'에서 일으켜달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주지 않으니 그녀가 스스로 떠나는 가능성만이 남아있다.
중력이 지배하는 듯한 습관처럼, 일상의 공간으로 다시 되돌아가면서 그녀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녀만의 바라봄이기에 사사키보단 오히려 사실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사사키가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죄책감? 혹은 미래?
앞으로 올 시간과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에 눌릴대로 눌린 그를 기다리는 건 입대자원서를 갖고 온 아들이다. 사사키의 오기는 여기, 최후의 보루에서까지 내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발악으로 보인다. 이미 그의 아들은 훌쩍 커버려서 그가 올려다 봐야 하지만, 그는 그래도 지켜야 한다. 그게 그에게 남은 마지막이니까.
서로에게 비밀을 만들어가는 가족, 그건, 아마- 서로가 반대하거나 또는 실망할 게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존재지만 가장 먼 존재의 이름이 가족이다. 가장 편안한 공간이지만 가장 감옥같은 곳이 집이다.
사사키는 자신에게 할 이야기를 켄지에게 하고 있다. 닮은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이 때문이었나 싶을 정도다. 자신과 닮은 어깨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과 마주치던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쏟아낸다. 부모가 가장 쉽게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자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닥달하여 괴롭힌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다. 자녀가 자신의 분신이라 생각하기 쉽기에 '나'에게 할 이야기를 '아이'에게 함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사사키 역시 그렇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말은 그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메구미는 그토록 원하던 차를 인질이 되어서야 몰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하룻밤'의 시작이다. 사사키를 만난 순간, 이전까지 에스컬레이터에서 멍~하던 -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 그녀는 무어에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차 지붕을 열고 달릴 거다.
켄지는, 새로운 시작을 바란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떠나려고 했다.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걸까. 왜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리고 싶다는 소망이 헛된 것임을 알고 있을까.
터덜터덜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다.
바닷가에는 두 줄의 타이어 자국 뿐. 모든 걸 잃은, 혹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사람은 밤 같았던 바다 속으로 사라졌고 그녀는 잠들었다 눈을 떴지만 여전한 현실을 마주 하며 숨을 쉬듯 걸어야 할 뿐이다.
자연스레 머리속에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 가족은, 과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토록 쪼개지고 파편화되고 상처입고 날이 섰다 부러진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메구미가 조용히 숨을 쉴 때, 하나 하나 힘겨운 듯 숨을 쉼에 따라 태양은 천천히 떠오르고, 아침의 햇살을 받아 피어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 역시 그녀가 가졌을 법한 실낱같은 희망 - 어쩌면 헛된 기대로 드러날 수도 있는 -을 갇게 된다. 응, 그래, 돌아가야지.
그녀의 하루는 일탈일까? 그의 밤 역시 일탈이었을까?
이렇게 상처 입히고 상처 입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나는 좋다. 아릅답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지친 발걸음이지만 그래도 좋다.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을 다시금 힘을 내어 껴안을 수 있는 작은 힘을 받는 듯 하다. 또다시 내팽겨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순간이 오지만 그래도 이걸 안고 가겠다는 의지를 부여잡게 만드는 풍경이다.
마지막에 울려퍼지는 켄지가 연주하는 드뷔시의 월광은 메구미가 찾던 육지의 빛이기도, 사사키가 바라던 목적지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의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공유할 수 있는 관객의 모습이 조금 고마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신문과 잡지. 집 안은 방치된 듯 싶다. 피트하게 단정된 집 안에 부는 바람은 흡사 싸늘한 폐허와 같은 느낌을 준다. 비가 들이차는 창을 닫고 분주하게 바닥을 닦는 메구미는 무심코 올려다본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하고 다시 창을 연다. 그렇게 열심히 닦던 바닥에 다시 빗물이 들이차는데도. 이 오프닝 씬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한 번에 표현해주었다. 황폐하게 버려진 듯한 집안, 가족의 생활공간- 그 안으로 폭풍우를 알리는 빗물이 휘몰아치는데 집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알고 있고 포용할 주부는 그 풍경에 넋을 놓은 듯 멍하니 바라본다. 그 순간 주부의 역할은 잠시 잊혀지고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 그녀는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것일까.
폭풍우는 곧장 사사키에게로 이어진다. 웅웅웅웅- 휘몰아치며 울리는 바람소리는 끝을 알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절망으로 그를 밀어넣는 모터 소리 같기도 하다. 뭔가 잘못됐다는 듯한 기분, 이건 아닐 거라는 기분, 내 자리가 없어지기 전에 - 이미 없어진 셈이지만 - 내가 없애고 나오겠다는 듯한 굳은 손놀림. 하지만 그도 알고 있을 거다. 나는 빼앗긴 거다- 라는 상실감.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확실치 않아졌지만.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니,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사는 게 얼마나 될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러면서 돈을 벌고, 또 하루하루 살고, 미래를 대비한다고 말한다. 사사키는 잠시 망설이다 출근하는 인파 속으로 섞여든다. 애초에 집을 나설 때부터 어디로 향해야 할 지 알지 못 했다. 그가 매일 아침 나서던 길은 습관이자 의무이고 책임, 그리고 동시에 권리였으니까. 그 모든 것의 집약점인 '직장'이 사라진 마당에 그의 목적지는 상실되었다. 그는 그렇기에 다시 목적지를 설정하고자 한다.
축 처진 어깨와 터덜터덜 걷는 발걸음의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있다. 하루, 아들의 열린 가방을 닫아준다. 또 하루, 그저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 걸어간다. 그렇게 하루, 하루, 가족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생겨난다.
비가 들이차는데도 멍하니 밖을 바라볼 때부터 메구미의 주위에 감도는 분위기는 일종의 갈망이다. 무심한 척, 아무 것도 아닌 양 웃으며 넘어가지만 '운전면허'는 그녀의 내밀한 욕구를 표방한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그녀에게도 want가 존재한다. 가족들이 먼저 밥을 먹고 일어나면 홀로 식탁에 앉아 밥을 마저 먹는 그녀, 어머니- 혹은 아내-이기 이전에 그저 주부라는 얼굴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한 가정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얼굴.
"일으켜줘-"어렸을 적엔 손을 위로 뻗으면 엄마나 아빠가 주욱 당겨 일으켜줬고- 나는 그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누워서 꼼짝하기도 싫지만 일으켜주니 못 이기는 척-하며 일어나면서 끊기지 않고 주욱 부드럽게 일어나 앉게 되는 그 기분이 좋아 들키지 않게 싱긋 웃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메구미의 뻗은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사람은 없다.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은 힘없이 허공에 떠 있을 뿐이다. 일으켜달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일으켜달라는 말이다. 여기, 소파, 혹은 집, 그녀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중력이 존재하는 집이다.
"누가 나 좀 일으켜줘-"
그녀가 신분증 대용이 아닌 면허증을 따고, 차를 보러 가는 것 역시 '여기'에서 일으켜달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주지 않으니 그녀가 스스로 떠나는 가능성만이 남아있다.
중력이 지배하는 듯한 습관처럼, 일상의 공간으로 다시 되돌아가면서 그녀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녀만의 바라봄이기에 사사키보단 오히려 사실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사사키가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죄책감? 혹은 미래?
앞으로 올 시간과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에 눌릴대로 눌린 그를 기다리는 건 입대자원서를 갖고 온 아들이다. 사사키의 오기는 여기, 최후의 보루에서까지 내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발악으로 보인다. 이미 그의 아들은 훌쩍 커버려서 그가 올려다 봐야 하지만, 그는 그래도 지켜야 한다. 그게 그에게 남은 마지막이니까.
"이 집과 너희를 지키는 건 나야!"기차 소리가 이명처럼 울린다. 귀를 멍멍하게 울리는 기차 소리는 이전의 폭풍우 소리와도 같다. 공기를 타고 오는 진동, 그 떨림은 시선의 마주침으로 이어진다. 아, 뭔가 잘못 됐어- 라는 기시감은 그래, 알고 있구나-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건가- 라는 부부의 소리 없는 대화 아래 깔린다. - 그들이 진정 대화를 한 적이 있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하는 게 뭔데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같은 집안에 그어진 국경. 남겨진 엄마는 대체 아이의 무엇을 보았던 걸까. 같은 공간이지만 단절된 공간이기도 한 집은 참 복잡하고 오묘한 소우주다. 그녀는 국경을 넘어선다.
"그런가?"
"주부 노릇도 나쁘지만은 않아."
"난 잘 모르겠어요."
서로에게 비밀을 만들어가는 가족, 그건, 아마- 서로가 반대하거나 또는 실망할 게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존재지만 가장 먼 존재의 이름이 가족이다. 가장 편안한 공간이지만 가장 감옥같은 곳이 집이다.
사사키는 자신에게 할 이야기를 켄지에게 하고 있다. 닮은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이 때문이었나 싶을 정도다. 자신과 닮은 어깨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과 마주치던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쏟아낸다. 부모가 가장 쉽게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자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닥달하여 괴롭힌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다. 자녀가 자신의 분신이라 생각하기 쉽기에 '나'에게 할 이야기를 '아이'에게 함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사사키 역시 그렇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말은 그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메구미는 그토록 원하던 차를 인질이 되어서야 몰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하룻밤'의 시작이다. 사사키를 만난 순간, 이전까지 에스컬레이터에서 멍~하던 -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 그녀는 무어에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차 지붕을 열고 달릴 거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죠."+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환상적인 씬은 -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던 - 바다를 바라보는 메구미의 뒷모습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하늘을 걷는지 땅을 걷는지 바다를 걷는지 심지어 허공을 밟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그녀가 본 빛은 별일까 달일까 육지일까 배일까, 그녀가 바라는 새로운 시작일까. 이 모든 것을 꿈으로 돌릴 수 있는 스위치를 바랐던 그녀의 눈에 비쳤던 한순간의 환상이었을까.
"지금까지의 인생이 전부 꿈이고,
눈을 뜨는 순간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다시 시작하고 싶어."
켄지는, 새로운 시작을 바란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떠나려고 했다.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걸까. 왜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리고 싶다는 소망이 헛된 것임을 알고 있을까.
터덜터덜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다.
바닷가에는 두 줄의 타이어 자국 뿐. 모든 걸 잃은, 혹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사람은 밤 같았던 바다 속으로 사라졌고 그녀는 잠들었다 눈을 떴지만 여전한 현실을 마주 하며 숨을 쉬듯 걸어야 할 뿐이다.
자연스레 머리속에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 가족은, 과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토록 쪼개지고 파편화되고 상처입고 날이 섰다 부러진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메구미가 조용히 숨을 쉴 때, 하나 하나 힘겨운 듯 숨을 쉼에 따라 태양은 천천히 떠오르고, 아침의 햇살을 받아 피어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 역시 그녀가 가졌을 법한 실낱같은 희망 - 어쩌면 헛된 기대로 드러날 수도 있는 -을 갇게 된다. 응, 그래, 돌아가야지.
그녀의 하루는 일탈일까? 그의 밤 역시 일탈이었을까?
이렇게 상처 입히고 상처 입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나는 좋다. 아릅답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지친 발걸음이지만 그래도 좋다.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을 다시금 힘을 내어 껴안을 수 있는 작은 힘을 받는 듯 하다. 또다시 내팽겨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순간이 오지만 그래도 이걸 안고 가겠다는 의지를 부여잡게 만드는 풍경이다.
마지막에 울려퍼지는 켄지가 연주하는 드뷔시의 월광은 메구미가 찾던 육지의 빛이기도, 사사키가 바라던 목적지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의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공유할 수 있는 관객의 모습이 조금 고마웠다.
2009/04/19 01:38
2009/04/19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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